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7대 대통령 선거 (문단 편집) === [[대통합민주신당]] === [include(틀:대통합민주신당 제17대 대통령 후보 경선)] ----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책 등으로 여당은 국민들의 신임을 잃어갔으며, 정권교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유행어]]로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가 있다. 게다가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참패로 인해 거의 붕괴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는 중에도 여권에서도 유력 후보는 존재했으니, 그는 바로 [[고건]] 전 총리였다. [[노무현 탄핵 사태]] 당시 잠깐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으면서도 탁월한 행정능력을 보이며[* 그러나 [[노무현]]과의 관계는 끝이 개운치 못했는데, "나와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라는 악평을 내리며 사실상 둘은 결별한 사이였다.]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넓은 계층에게 인정받으며 초창기 모든 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고건]] 전 대통령 권한대행은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특정 정당 지지 발언을 하지는 않았다. 또한 직설적인 화법의 소유자도 아닌지라 논란이 될 발언을 한 적도 없었다. 정치인이 아닌 전형적인 관료형 인물이었기 때문에 보수, 진보 양쪽에서 무난한 평가를 받았다.] [[고건]] 본인이 풀었던 후일담을 보자면 나름대로 자신의 당시 입지를 분석하는 등[* [[한나라당]]에게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민심, 호남 출신이라는 지역적 한계, 관료 출신으로서 [[대통합민주신당]] 내부에서도 어중간한 입지와 [[노무현]]과의 갈등으로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 계파적 스탠스 등.] 스스로도 출마 생각이 없진 않았던 걸로 보였고 한편으로는 [[한국의미래를준비하는당]](약칭 '한미준')이라는 고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자칭) 지지세력이 등장하는 소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과가 신통치 못하고 스스로도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고는 한미준은 '자신과는 관련 없는 정당이다'라는 입장을 피력하며 지지 세력을 흡수하지는 않았고 이어 불출마를 선언하며 그의 대통령 추대는 일찍이 일단락되었다. 이로서 여당의 대권 후보는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지고 만다. 그나마 유력 후보라 할 만한 사람은 [[정동영]]과 [[김근태]] 정도인데 이 두 사람은 통일부 장관 자리를 두고 경쟁[*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력 주자들을 내각에 입각시키면서 통일부와 보건복지부를 제안했는데, 당시 대북정책이 온건 기조였던 데다가 [[북한]]도 [[제2연평해전]] 이후로 딱히 사고를 치지 않았고(핵실험 이전이었다.) 해서 통일부장관의 정치적 위상이 훨씬 높았기에 두 유력 정치인이 충돌했던 ~~니가 가라 복지부~~ 결국 정동영이 이겨서 통일부장관을, 김근태가 보건복지부장관을 각각 맡았다.]을 벌인데다 두 후보 모두 여러 선거에서의 참패 책임이 있었다. 그나마 김근태는 열린우리당의 의장을 맡은 것이 한 번 뿐이었지만[* 정확히는 정동영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금 의장으로 뽑혔는데, 해당 선거는 "한나라당의 싹쓸이를 막아주십시오"(...)로 요약될 만큼 여당에게 있어 역대급 대참사가 난 선거였고, 결국 정동영이 선거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사퇴하면서 차석 상임중앙위원(요즘으로 치면 수석최고위원)이던 김근태가 의장 직을 승계받은 것이었다.] 정동영의 경우에는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당 의장으로서 대참패의 직접적 책임을 지고 있는 상태였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당시 유력 후보군들로는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 [[천정배]] 전 법무부장관이 있었다. 셋 다 내각 출신인데, 유력 대권 주자가 없자 대통령과 청와대가 당 내 중진 및 신임하는 인사들을 내각에 기용시켜 무게감을 더해주려는 배려였다. 당 상황이 개판이 되고 당 내 후보군이 다 상처투성이인 상황에서 [[김한길계]]는 범여권 재편을 목적으로 탈당을 결행,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고, 이를 신호탄으로 '''대선후보군을 포함한 현역 의원 상당수의 연쇄 탈당'''이 시작되었다. 이후 중도개혁통합신당측과 손학규를 중심으로 한 한나라당 탈당파가 연대하고, 민주당 탈당파가 여기에 합류하였으며 열린우리당이 해체하여 흡수되는 형식으로 모여서 [[대통합민주신당]]이 결성된다. 창당 직후 대통합민주신당은 바로 대선후보 경선에 착수했으나 후보들 상태가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그런 주제에-- 엄청난 수의 후보가 쏟아져나와 [[컷오프]]를 해야 했다. 통합신당파의 지지를 받은 정동영, 한나라당 탈당파로서 인지도나 긍정적 측면에서 우월했던 손학규[* 한나라당에선 분명 인지도, 지지율 등등 다 밀려서 탈당했지만, 한나라당의 제3후보가 바로 범여권 정당의 유력 후보가 될 지경이었다.(...)], 구 열린우리당과 친노계의 집중 지원을 받은 이해찬이 범여권 Big3으로 불렸으며, 친노계에선 추가로 한명숙 전 총리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장관]]이, 구 민주당계 탈당파에선 [[추미애]] 전 의원이, 그리고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신기남]] 의원과 [[천정배]] 전 [[법무부장관]]까지 9명이 출마했다. 다른 유력 후보들이였던 김근태와 [[정세균]] 전 의원은 출마를 포기했다.[* 이 당시 김근태가 대선 재도전을 포기해야만 했던 이유는 후일 출간된 '근태 선생 관찰기'(최만영 저)에 담겨있는데, 2007년 어느 날 김근태의 보좌관으로 일했던 한 인사가 그의 연설비서관이자 핵심 참모 중 한 사람이었던 저자를 조용히 보기를 청했고, 거기서 김근태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파킨슨병]]을 앓고 있단 소식을 전했다고 적혀있다. 김근태의 모습을 본 한 [[서울대학교병원]] 의사가 그에게 진찰을 받는 것이 좋겠다 말했고, 곧바로 파킨슨병 확진을 받은 것. 물론 당시 그는 자신이 병을 앓고 있단 소식을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그 대신 민주개혁 세력의 대통합을 위해 불출마한다는 이야기만 남겼다.][* 이후 김근태는 [[제18대 국회의원 선거|18대 총선]]에서 접전패하며 낙선했고, 몸이 성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집회 현장에 참석하거나 싱크탱크였던 한반도재단(현 김근태재단) 활동에 집중했다. 그러나 정치 복귀는 끝내 하지 못했는데, 앞서 이야기한 대로 정치 복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 그러다 2011년 말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고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된다.] 8월 27일 컷오프에서 [[추미애]], [[천정배]], [[신기남]], [[김두관]] 4인이 탈락한다. 이후 시작된 본선 경선에서는 [[한명숙]], [[유시민]] 후보가 차례대로 후보직을 사퇴하며 같은 [[친노]]계인 [[이해찬]]을 지지했다.[* 참고로 경선 과정 TV 토론에서 [[한명숙]]은 대리모를 '''아이 대신 키워주는 사람'''으로 해석하고, [[유시민]]은 멧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전사를 투입하겠다고 말해 일반인들의 웃음과 범여권 지지자들의 한숨을 자아냈다. 특히나 유시민은 지고나서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문국현]]을 지지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래도 대선을 40여일 앞두고는 다시 [[정동영]] 지지를 선언하며 대통령 선거 캠프에 합류했다. 하지만 유시민을 따라 문국현을 지지한 [[김영춘]]은 끝까지 [[창조한국당]]에 잔류하였다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탈당. 결국 2010년 [[손학규]] 전 대표가 지명직 최고위원을 주기 전까지 당을 떠나 돌아오지 않게 된다.] 결국 남은 빅3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지니고 있던 정동영이 후보로 선출된다. [[손학규]]는 한나라당 탈당파라서 당 내 조직력이 너무 미약했고 애시당초 탈당을 함께 한 동반자들도 거의 없었으며,[* [[손학규]]는 어떻게든 소장파들을 동반 탈당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남경필]]과 [[원희룡]] 등이 대표적으로, 이들은 손학규가 나가고 양강 구도가 되면서 [[이명박]]을 지지하게 된다.][* 그 외에 [[손학규]]가 특히 동반 탈당을 위해 강력히 권유했던 워싱턴 동지인 [[홍준표]]는 어쨌든 당은 지켜야 한다, 탈당은 안 된다며 고사했다. 결국 손학규와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한 무게감 있는 정치인은 전무했다. 후일 3선 중진의원이 되는 [[이찬열]]이 있긴 한데, 이때 당시엔 [[박종희|당협위원장]]과 싸우고 나와서 무게감 하나 없는 전직 도의원에 불과했다.] 이해찬은 유시민, 한명숙의 지원을 받았지만, 친노계 후보였기에 배척받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박스떼기]] 논란이 터져버리는 등 해당 경선도 진흙탕 싸움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후 정동영은 어떻게든 범여권 및 진보 진영 후보와 후보단일화를 시도하려 했으나 입싸움으로만 끝난 채 모두 실패로 끝난다. 공교롭게도 이때의 빅3는 11년 후 각각 다른 정당의 당대표 선거에서 당선된다.[* [[이해찬]]은 [[더불어민주당]], [[손학규]]는 [[바른미래당]], [[정동영]]은 [[민주평화당]].][* 아이러니하게도 또 4년 뒤엔 손학규 빼고 이 둘은 [[제20대 대통령 선거]]로 인해 '''[[더불어민주당|다시 뭉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